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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無名)의 서

 

벗이여,
너는 말했지, 젊음은 봄날처럼 찬란하다 했지.
허나 나는 그 봄을 기억하네.
창살 너머로 스며들던 피 젖은 햇살,
내 영혼이 스스로를 가두었던 시간.

그대들이 말하는 황금의 세월
천진난만하고 걱정조차 몰랐던 시절이라지만,
내겐
말 없는 심연 깊이 내리박힌 슬픔의 씨앗이었지.

그 씨앗은 살처럼 자라
가슴 밑 한곳 고름처럼 응고됐고,
세상 어느 지혜도
그걸 도려내지 못했지;.

어느 날,
사랑이란 것이 내게 와
칼처럼 심장을 열었다.

피는 눈물이 되었고,
혀는 말문을 트며,
나는 다시 태어났다.

그대가 기억하는 정원과 나무 아래의 속삭임,
나는 기억하지 않는다네.
나는 다만 북쪽 에덴의 바람을 기억하지.
그곳의 산은 솟아나 침묵이 되고
골짜기엔 갈구하는 비혼의 그림자

나는 귀를 틀어막고
도시의 소리를 밀어냈지만,
남은 건 실개천의 울음이었네.
잎사귀 하나하나 떨며
이 세상의 목소리를 대신해 울고 있었지.

그날들의 기억은
독이었고,
나는 들판을 향해 몸을 던졌다가
이유 모를 허기를 안고 돌아왔지.

비가 내릴 땐,
하늘이 우는 줄만 알았지.
그 빗줄기가 가슴을 때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울음은 내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알았지.

순진한 자는 텅 빈 자라 하지만
나는 느꼈고,
느끼되 너무 많이 느끼고,
알지 못하는 것들을 너무 원했지.

그러한 이여,
나는 하늘에 이끌리며 땅에 묶인 자.

눈은 별을 보았으되
발은 먼지에 빠지고,
마음은 끝없이 찢기었네.

그 고독은
내 안의 불을 끄는 물이었고,
동시에 다시 피워낸 불씨였지.

나는 어른처럼 외로웠고,
놀지 않았으며,웃지도 않았다,
그저 깊은 산의 고인 물이 되어
하늘과 나무의 그림자만 삼켰네.

흘러가려 하였으나
갈 길을 몰랐지.

그러다 열여덟의 해가 찾아왔고
그 해는 칼날같이 내 앞에 서있다.
진리는 칼날이 되어 내 가슴을 후비고

그 상처가 아물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나야 했고,
나는 책 속에 잠자는 자가 아닌
그 책이 되려 했다.

나는 어느 여인의 눈에서
하늘을 보았고,
어느 사내의 눈에서
지옥을 마셨지.

그리하여 나는 알았네

천사를 보지 못한 자는
악마도 보지 못하리니,
그대 사랑을 모른 자며
텅 빈 혼이리라.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텅 빈 혼의 끝을 찾아

죽을 때까지,
진리의 칼끝으로
가슴을 후비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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